채식

채식(비건) 도시락으로 버틴 직장인의 점심 4주 기록

llyn1815 2025. 7. 5. 08:00

나는 평범한 9시 출근, 6시 퇴근의 사무직 직장인이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점심시간은 유일한 숨구멍 같은 시간이었다. 맛있는 걸 먹고, 동료들과 웃고, 잠시 업무를 잊을 수 있는 작은 쉼표.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쉼표가 나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건강과 환경, 그리고 내가 섭취하는 음식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나는 점차 채식을 실천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기를 줄여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한 채식(비건) 유튜버의 도시락 영상이 인상 깊게 남았고, 나도 내 식사를 의식적으로 선택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예상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했다. 회사 근처의 식당은 거의 모든 메뉴에 고기나 육류 기반의 육수가 기본이었고, 샐러드조차 닭가슴살과 치즈가 포함돼 있었다. “조금 먹는다고 뭐 어때?”라는 동료들의 말은 한 끼를 타협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내가 나를 잃어가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언가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 ‘관계에서 빠져나온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같은 식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건, 어느 순간 대화의 끈이 느슨해진다는 걸 의미했고 나는 점점 더 소속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내 몸을 위해, 내 가치관을 위해, 무엇보다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다시 갖기 위해서라도 나는 점심을 타인의 선택이 아닌, 나의 손으로 준비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바로 '채식(비건) 도시락'이었다. 내가 직접 만든, 내 기준대로 구성된 점심 한 끼. 그게 처음엔 조금 귀찮았고, 조금 외로웠지만, 결국엔 나를 지켜내는 중요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이 글은 내가 한 달간, 채식(비건) 도시락으로 직장에서의 점심을 버텨낸 기록이다. 단순한 식단 후기가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나답게 먹고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의 이야기다. 그 안엔 시행착오도 있었고, 눈치도 있었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확신과 성장이 담겨 있었다.

직장인의 채식(비건) 점심 도시락 4주 기록

채식(비건) 도시락 싸기 1주 차: 맛도, 양도, 시선도 쉽지 않았다

채식(비건) 도시락 첫 주는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나는 그동안 도시락을 싸본 적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고기 없이 구성된 도시락은 더더욱 낯설었다. 그래도 뭔가 시작은 해야겠기에, 퇴근 후 저녁 시간을 활용해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도전한 건 두부조림이었다. 물기를 제거한 두부를 한 입 크기로 썬 뒤, 팬에 기름 없이 구워 겉을 바삭하게 만든 후, 간장 2큰술, 알룰로스 1큰술, 다진 마늘과 참기름을 섞은 양념장을 넣고 약불에서 졸였다. 맛은 꽤 괜찮았지만, 아침에 다시 꺼내보니 겉면이 눅눅해져 흐물흐물한 식감이 됐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도 애매한 도시락 특성상, ‘식었을 때 맛있는 음식’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절감했다.

 

두 번째 반찬은 병아리콩 샐러드였다. 전날 밤 불려놓은 병아리콩을 30분 정도 삶고, 방울토마토, 다진 오이, 삶은 옥수수, 아보카도와 섞은 뒤 올리브오일, 레몬즙, 소금, 후추로 간단한 드레싱을 만들어 버무렸다. 맛은 상큼했지만, 회사에서 점심시간쯤 되니 아보카도가 색이 변하고 물이 생겼다. ‘생채소 + 유성 드레싱’의 조합은 몇 시간 지나면 금방 식감과 맛이 떨어진다는 걸 배웠다.

 

세 번째는 구운 감자와 고구마였다. 전자레인지 대신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만든 뒤 도시락 통에 담았는데, 이건 그나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감자는 쉽게 부서졌고, 양이 많지 않으면 포만감이 부족했다.

 

이렇게 구성된 도시락 1호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지금와서 정리를 해보자면 반찬 3종 중 2종은 식감 실패, 아침 준비 시간은 무려 1시간 소요, 점심시간에 먹을 때 식은 두부의 비린 맛에 당황, 옆자리 동료의 “건강해 보이는데, 난 못 먹겠네”라는 말에 살짝 상처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게다가 도시락을 먹는 위치도 애매했다. 구내식당을 피하려고 회의실 빈 자리를 찾거나, 탕비실 옆 구석에서 조용히 먹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눈치를 봐야 했고, 전자레인지 줄이 길어지면 도시락을 포기하고 그냥 샐러드 한 팩으로 때우기도 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고기를 안 먹는 나’에 대한 자기방어감이었다. “채식한다고 잘난 척하는 건 아니지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상한 선택을 한 사람처럼 느껴질까 봐, 도시락을 꺼낼 때도 일부러 조용히 행동하게 됐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시락이 실패할수록 더 많은 걸 기록했다. 어떤 조합이 괜찮았는지, 어떤 음식은 금방 상했는지, 아침 시간과 소요 시간은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를 작은 수첩에 매일 메모했고, 그 기록들은 곧 ‘도시락의 진화’로 이어졌다. 1주 차는 시행착오 그 자체였다. 맛도 부족했고, 양도 안 맞았고, 눈치도 보였지만 그 실패 하나하나가 ‘내가 진짜 원하는 식사’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국, 도시락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기초가 되어주었다.

 

채식(비건) 도시락 싸기 2~3주차: 도시락이 루틴이 되자 삶도 안정됐다

2주차부터 나는 도시락 구성 방식을 바꿨다. ‘매일 만들기’에서 ‘주간 밀프렙(meal prep)’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일요일 저녁이면 나는 일주일치 식단을 미리 계획하고 조리했다. 병아리콩은 삶아서 소분해 냉동, 양배추·브로콜리는 살짝 데쳐 물기 제거 후 냉장 보관, 두부는 오븐에 구워 겉을 바삭하게 만든 후 포장. 곡물밥은 5등분해 냉동시켰다. 이제 아침에는 그저 조합만 하면 됐고, 도시락 준비 시간은 30분에서 10분으로 단축됐다. 도시락의 맛도 좋아졌다. 양배추에 아몬드버터 드레싱을 곁들이고, 렌틸콩 카레를 퀴노아와 함께 싸면, 식은 상태에서도 깊은 맛이 유지됐다. 간편하면서도 영양은 놓치지 않는 구성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변의 반응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거 어디서 배운 거야? 맛있어 보인다.”, “샐러드 먹을 때 네 드레싱 좀 나눠줄래?”. 동료들은 내 도시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몇몇은 따라 해보겠다고 도시락통을 새로 샀다.

 

3주차에는 도시락 자체가 내 정체성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며 하루의 컨디션을 점검하고, 재료를 조합하면서 내 취향을 알아갔다. 단순한 식사 준비가 아니라, ‘나를 케어하는 시간’이자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 되었다. 또한 식단 변화는 내 몸과 감정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점심 식사 후 졸음이 사라졌고, 오후 회의 때 집중력이 확연히 좋아졌다. 소화불량이 줄었고, 저녁 식사량도 자연스럽게 줄어 체중은 2kg 감량되었다. 피부 톤도 한결 맑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한 끼 도시락이 바꾼 건 식단이 아니라 내 하루 전체의 에너지 흐름이었다.

 

채식(비건) 도시락 싸기 4주 차: 채식 도시락은 곧 나를 존중하는 도구였다

나는 도시락을 싸는 데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기를 안 먹겠다’는 실천이었지만, 한 달이 지나고 나니 이건 분명히 ‘나를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회사 동료들의 시선은 여전히 다양했다. 누군가는 “진짜 대단하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나는 절대 못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왜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는지, 왜 고기 없는 한 끼를 선택했는지를 매일 스스로에게 증명하며 살아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점심시간에 그저 배를 채우는 데 집중했다. 식당에서 정해진 메뉴를 아무 생각 없이 먹고, 그 이후엔 졸리고, 후회하고, 카페인으로 버텼다. 그런 패턴이 너무 익숙해서 불편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시락을 시작한 이후, 나는 단순히 식습관이 바뀐 게 아니라 나를 돌보는 감각 자체가 깨어났다. 내 도시락엔 내가 좋아하는 재료가 들어가고, 내가 원하는 조리 방식과 양념이 담겨 있었다. 하나하나 선택하고 준비하는 그 과정이 ‘나는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어’라는 작은 자기확신이 되었다. 또한 이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자기 돌봄은 대단하고 거창한 변화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침 10분을 더 일찍 일어나고, 주말 저녁 1시간을 조용히 재료 손질에 쓰는 일. 그 소소한 시간들이 모여 내 하루 전체의 균형을 만들어주었다. 도시락은 나만의 공간이자 쉼표였다. 바쁜 업무 사이에서 잠시 나를 마주하고, 온전히 내 페이스로 음식을 씹고, “괜찮아, 오늘도 잘하고 있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건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에게 딱 맞는 속도로, 자신만의 식사와 삶의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 채식이든, 도시락이든, 아니면 완전히 다른 방식이든 말이다. 핵심은 ‘내 삶을 내가 설계해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혹시 지금, 나처럼 직장에서 점심시간이 의무감과 타협의 연속처럼 느껴지고 있다면, 혹시라도 한 끼 식사가 당신의 감정과 정체성을 조금씩 침식시키고 있다면 그때는 도시락이라는 방식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스스로에게 집중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그 작은 동작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첫 신호가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