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가족 모두 잡식인데 혼자 채식하는 법 – 부딪히지 않고 설득하는 전략

llyn1815 2025. 7. 4. 18:00

채식을 시작한 순간부터 내가 마주한 첫 번째 장벽은 음식이 아니었다. 바로 가족이었다. 나는 어느 날 문득, 더는 이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고기를 씹고 싶지 않았다. 건강에 대한 걱정도 있었고, 환경 다큐멘터리에서 본 축산업의 현실도 충격적이었고, 무엇보다도 내 몸에 쌓이는 무거운 느낌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일주일만이라도 고기를 끊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식습관을 바꿨다. 하지만 그 변화는 곧 가족과의 작은 전쟁으로 번졌다. 어머니는 “엄마가 주는 것만 먹으면 건강해~ 너가 맨날 얄구진 것만 먹어서 그렇지”하며 어머니께서 차린 음식 먹기를 원하셨고, 아버지는 “고기를 안먹으면 허약해진다”며 불쾌해하셨다. 오빠는 “또 유튜브나 인스타에서 보고 감명받았냐”며 놀리듯 말했고, 나는 그 식탁에서 조용히 밥만 먹으며 대화를 피했다. 나는 몰랐다. 내가 음식을 바꾸는 일이, 이렇게까지 가족의 정서에 균열을 줄 수 있는 문제일 줄은. 이건 단순한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가족이 수십 년간 쌓아온 식사의 의미, 공동체의 루틴, 그리고 관계의 방식 자체를 건드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나는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물러서지 않되, 부딪히지 않으며 내 선택을 지키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이 글은 그런 나의 시행착오 기록이자, ‘혼자 채식하는 것’이 단순한 식단 유지가 아니라, 사람들과 공존하는 연습이라는 걸 알게 된 과정이다. 가족과 갈등하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식사하고 살아가는 법.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차분히 나눠보려고 한다.

가족 모두 잡식인데 혼자 채식하는 법

혼자 채식, 처음엔 모두가 반대했다: 거절·비난·불신의 3단 콤보

내가 채식을 시작한다고 말했을 때 가족들의 첫 반응은 단순히 놀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거절이었다. “그러면 밥 따로 차려야 하니?”라는 어머니의 말은 채식 선언 직후 들은 첫 문장이었다. 가족 입장에서는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게 곧 식사 준비의 부담 증가로 느껴졌고, 이는 예상보다 민감한 문제였다.

 

다음은 비난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건 외국 애들이나 하는 거다. 한국인은 삼겹살 먹고 자란 민족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심지어 몇몇 친척들은 “그거 종교야?”, “왜 갑자기 이상한 거에 빠졌어?”라고 물으며 채식 = 이상한 신념으로 보는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불신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채식을 선언한 뒤에도 “너 오늘 몰래 고기 먹은 거 아니야?”, “저거 하다 말겠지”라며 내 결심을 일시적인 충동 정도로 여겼다. 그 무렵, 나는 한동안 가족과 식사 자리를 피하거나 대충 넘기기 일쑤였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식탁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 이 시기를 지나며 나는 두 가지 선택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가족과 계속 대립하며 내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 다른 하나는 ‘설득이 아니라 이해를 이끌어내는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 나는 후자를 택했다.

 

혼자 채식하며 가족과 부딪히지 않고 설득하는 5가지 전략

첫번째, 설명보다 ‘공감’을 먼저

사람은 낯선 것보다 낯선 사람의 태도에 먼저 방어적이 된다. 초기엔 “고기가 몸에 안 좋다”는 식의 정보 전달보다, “나 요즘 속이 자주 더부룩해서 소화가 잘 되는 식단으로 바꿔보려고 해”라는 몸의 변화 기반 이유를 공유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건강을 챙기려는 모습에는 부모님도 반대할 명분이 줄어든다.

 

두번째, 식단을 나누지 말고 ‘보완’하기

가족이 고기 반찬을 먹는다고 해서 내가 아예 식탁을 따로 차리진 않았다. 나는 주로 같은 식사를 하되, 내 접시에서 고기만 빼고 대신 두부나 아보카도를 올려 먹는 방식을 택했다. 이 방식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내 채식 유지에 큰 도움이 됐다. ‘같이 먹되 다르게 구성한다’는 유연한 자세가 핵심이다.

 

세번째, 새로운 음식으로 ‘경험’을 나누기

가끔은 내가 만든 비건 요리를 가족에게 나눠주었다. 예를 들어 병아리콩 커리, 두유 크림 파스타, 비건 고추장 비빔밥 같은 요리는 고기가 없어도 충분히 맛있다는 인상을 줬고, “이거 맛있네?”라는 반응이 나온 순간, 가족의 심리적 저항선이 무너졌다.

 

네번째, ‘건강 정보’는 믿을만한 출처로 간단하게

아버지가 고기에 대한 의심을 가질 때는, 긴 설명 대신 국내 방송이나 건강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채식 위주 식단이 중성지방 수치에 긍정적 영향을 줬다”는 내용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효과적이었다. 단순히 “그렇대”가 아니라 사실과 사례를 함께 보여주는 태도가 중요하다.

 

다섯번째, 완벽한 채식보다 ‘지속 가능한 유연함’을 선택

나는 처음부터 “절대 고기는 안 먹어!”라는 선언보다는, “일단 평일엔 채식 위주로 해보려고 해”라는 말로 가족의 거부감을 줄였다. 그리고 때때로 외식 자리에서 고기를 먹는 나를 가족이 보았을 때 “어? 너 채식한다며?”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었지만, 나는 웃으며 “주 5일 채식 프로젝트 중이라 오늘은 예외야”라고 답하며 채식을 ‘규칙’이 아닌 ‘루틴’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유연한 접근이 가족의 신뢰를 유지하고 나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포인트였다.

 

관계를 지키며 나를 지키는 채식 식사법

혼자 채식을 한다는 건 단지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다. 그건 삶의 우선순위를 새로 정하고, 인간관계를 다시 조율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족과 부딪히지 않고 채식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가족을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동반자’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건강을 지키고 싶었고, 가족은 그 방식이 낯설고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그걸 서로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인정한 순간, 내 선택은 가족 사이에서 이질적인 행동이 아닌, 존중할 만한 태도가 되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여전히 잡식을 유지하지만, 내가 채식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내가 먹을 반찬을 따로 준비해주기도 하고, 아버지는 “고기 대신 콩 많이 먹더라, 괜찮은 거냐?”며 관심을 표현한다. 형제는 내 도시락을 보고 “오늘 거 맛있게 보인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는 더 이상 채식이라는 주제로 갈등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족보다 더 어려운 건 때로 직장, 친구, 사회적 관계 속 식사였다. 회식 자리에서 “너도 한 점만 먹어”, “이런 날은 예외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신념과 사회적 분위기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직장에서 내가 선택한 방식은 정중한 선 긋기였다. “요즘 속이 안 좋아서 채식 위주로 식단을 조절 중입니다.” 이 짧은 한 문장 안에 건강, 자율성, 배려가 담겨 있다. 억지로 설명하거나,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고, 내 입장을 차분히 밝히되 부드럽게 표현하는 게 핵심이다. 지인과의 식사에서는 대안 제안법이 효과적이었다. “이번엔 샤브샤브 어때? 야채도 많고, 고기도 따로 나와서 괜찮을 것 같아.” 같이 먹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만의 채식’이 아닌 ‘우리의 식사 선택’으로 유도하자 상대도 내 식습관을 존중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나의 기준을 지키면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식사법’이 있다는 걸 배웠다. 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타인에게 맞추기만 하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는 그 중간 지점, 바로 거기서 나는 내 식습관을 ‘생활’로 바꾸고, ‘관계’ 안에 자연스럽게 녹일 수 있었다. 채식은 혼자만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타인과 공존하는 방식의 하나일 수 있다. 내가 무엇을 먹든, 그 선택이 타인에게 강요가 아닌 존중으로 느껴지게 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바꾸지 않고도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다. 혹시 지금 당신이 채식을 하며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 단지 그 관계 안에서 ‘말하는 방식’과 ‘표현의 온도’를 조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말하는 연습, 거절하되 미소를 잃지 않는 태도, 내 선택을 강요하지 않고 공유하는 자세. 이 세 가지를 지켜낸다면, 채식은 더 이상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나다운 삶의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세상이 나를 이해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존중하고 이해해주는 것이다. 그게 식사건, 삶이건, 결국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모든 관계의 시작이니까.